9/24,火. 제14권 12.현수품賢首品(1) > 불교대학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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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火. 제14권 12.현수품賢首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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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구름 작성일24-10-04 14:41 조회3,048회 댓글16건

본문

오늘도 불대 법우님들 반짝반짝 잘 알아차리며 여유롭게 보내고 계시죠? 이제 설레는 시간, 숙제 내어 드립니다.

1. 화엄경 제14권 12. 현수품(1)
전체 게송을 꼭 간경看經하신 후,

2. 수업 주제가 될 # 보리심과 # 신심에 대한 각자의 이해(학구적인 풀이를 서치하는 것 포함)와 자기 견해를 설명 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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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원산(안학선)
숙제를 올립니다. 

보리심
보리라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리심은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다. 무상정득정각을 말하며, 더 이상이 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말한다.
최상의 깨달음의 목적은, 일체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입니다. 불도의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써 널리 중생을 교화하려는 마음.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려는 마음(상구보리하화중생). 한 없는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 끝없는 번뇌 다 끊으리라. 한량없는 법문 다 배우리라. 위 없는 불도의 다 증득하리라(사홍서원). 보리심은 모든 중생을 윤회를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기 하기위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염원, 모든 것이 공 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완전히 깨어난 마음을 말한다.(위키백과.원불교대사전) 

법회를 끝내면서 합장하며 성불하십시요.
그동안 수 없이  반복 하면서 성불하십시요 라는 얘기는 보리심 즉 아뇩다라삼먁사보리  부처님과 같이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 하기를 바라는 뜻 으로 자리이타 정신을 전달 하지만 정작 나는 스쳐 지나가는 얘기로 들은 것이 아닌지 진정한 불자의 모습으로 새겨 들었는지 곰곰히 생각하여 봅니다. 화엄경 공부를 하면서 왜? 보리심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을 하지 못 했을까? 마음속에 담아 놓치를 않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보리심에 대한 큰 뜻을 숙제를 통해 통찰해본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과 현실이 비중있게 나를 감싸고 있다.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성숙되는 과정 일까? 중생이 병들었기에 나도 따라서 병이들고 증생이 치유된다면 나도 따라서 치유 될 것입니다. 인간은 무명과 삶에 대한 욕망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나도 또한 그렇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에 들어가는 것이며 생사가 있으면 병이 있읍니다. 중생과 고통을 함께하는 보살의 모습을 표현하는 유마거사는,  문병을 받고 문수보살과의 나눈 이야기에 숙연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앞으로는 합장하며 성불하십시요 와 함께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같이 서원 할 것입니다. (불교신문 유마거사가 되자) 

신심
어떤것을 옳다고 굳게 믿는 마음.
불교의 가르침과 삼보를 의심 없이 믿는 마음.
이 신심에 의지하여 지혜를 얻고 불도를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화엄경 에서는 믿음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로서 일체의 착한 일을 자라게 하고, 일체의 의혹을 제거하며 위없는 깨달음의 문을 여는 것 이라고 정의 하였다. 또한 세상에 어떤일이 일어나도 물러나지않는 마음과 어떤 것을 굳게믿는 불퇴전의 마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어렸을때는 어머님이 어떤 말씀을 해도 믿고 따르며 어머님만 졸졸 쫒아 다니면서 얘야 가자 하면 신이나서 그냥 믿고 따라 갑니다. 어떠한 이유나 조건없이 순수한 마음에 설레이며 어디를가는데 하며 따라 갑니다. 설사 그곳이 지옥이라 할 지라도 엄마가 믿고있는 믿음에는 조그마한 의심이 있을 수 가 없읍니다. 그만큼 확고한 믿음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확고한 믿음이란 금강석 같이 단단하며 변함이 없읍니다. 믿음은 마음이 청정하고 교만을 없애고 공경의 근본입니다.
신심이 있어야 공양을 할 수 있고 보시를 할 수 있고 공덕도 쌓을 수 가 있읍니다.


오래전의 얘기를 해 볼까요. 그 당시 달라스 한인동포가 5만 정도가 되었을 때입니다. 지금은 13만,15만이 된다고 하니 정말 오래전 얘기입니다. 비지네스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를 않아 긴장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침부터 밖에서는 구호를 외치고 씨끄럽기만 합니다. 아침부터 삼삼오오 짝을지어 예고 없이 비지네스 장소에 들이닥쳐 할렐루야 하면서 어느교회를 다니냐고 묻길래 당신들은 예의도 없이 이게 무슨짓을 하고 있냐고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더니 미안 하다며 자기네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주려고 한 것인데, 미안 하다며 다시한번 어느교회 다니냐고 묻길래 나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니 여기서 나가 달라고 요구하자 그 얘기를 듣고 한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까지 불러드려 총 동원하여 저를 전도 하려고  야단법석 였읍니다. 저도 그 당시에는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논리가 부족하여 어떻게 하면 저들과 맞설수 있나 고민을 하던중 저도 모르게 당신들은 왜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 합니까 나는 김치찌게와 된장찌게가 좋은데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는 나에게 기름기가 있는 음식인 튀긴 돈까스가 맛있다고 권유를 하냐고 하면서 배운 사람들이 그만한 상식도 없냐고 하면서 몰아 부쳤습니다. 그랬더니 그중 한사람이 성스러운 예수님을 음식에 비유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손가락질을 하며 난리를 치며 사과 하라 하기에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니 조용해 지면서 하나둘씩 빠져 나가면서  당신을 꼭 전도하러 다시 오겠다고 하며 나갔읍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달라스 교회에서 전도대상 타겟 1호가 저였으며 다음이 조유상법사 였읍니다. 보현사 사원도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 스님도 안계시고 신도들끼리 운영하고 있는 것이 형편없어 보였기에 만만하게 하게 본 것 이었읍니다. 그래봐야 석가모니도 피조물이니 하면서 조롱할때 울화가 치밀어 올라 반박도 제대로 못 한 것이 후회되며 그래도 굳건한 믿음과  보현사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이 있었기에 지금 화엄경을 공부하고 있읍니다. 행여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면 피조물을 만든 누구인가 가 있다면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그분은 당신의 소중한 마음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한 당신의 소중한 마음이 깨달음으로 이루어지면 당신은 부처입니다. 하며 여유있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이것이 인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이고 결과이며 우리모두 함께 인연의 흐름따라 갈 것입니다.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능현(최수곤)
능현 숙제 올립니다.

보리심
여러 곳을 뒤져보고 보리심에 대해 가장 제 마음에 와 닿게 정의한 것을 옮깁니다.  
보리심이란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 즉 “깨달음의 마음”을 의미 합니다. 무주상보시를 하라, 화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면 중생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착한 일을 하려면 다 같이 착한 일을 해야지 나만 착한 일을 하면 나만 손해보고 나만 고통 받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중생심입니다. 이런 중생심을 털어내고 보리심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가 내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옆에서 좋은 이야기와 교훈적인 이야기를 해도 ‘세상물정 모르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마음. 모든 것에는 무엇이 포함될까요? 명예, 권력, 가족, 재력 모든 것이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나 자신, 내 목숨까지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한 각오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에야 중생심과 이기심이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안의 이기심을 털어내고 중생들을 위해 쓰이겠다는 각오를 계속해서 다져야 합니다. 그것이 계속될 때 내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만약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면 어째서 모두 성불(成佛)하지 못했습니까?”
보살이 뜻을 바로세워 법에 의지하고 여래와 성인을 가까이 섬기고,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그 마음을 잃지 않으면 보리심을 내게 될 것이오.
중생들이 나를 해치려 하면 ‘이 사람이 나에게 보리의 인연을 심어 주는구나. 만약 이런 이가 없으면 나는 무엇을 의지해 도를 이룰 것인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오히려 그를 자비심으로 대하시오. 교만한 마음을 내지 말고, 항상 법문을 듣고 말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하시오.

저에게는 아직 발보리심이 없는 듯 합니다. 부처님처럼 모든 중생을 고통스러운 윤회로부터 해탈케 하겠다는 그러함 보리심이 아니라 아직까지 탐진치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놓지를 못하는 듯 합니다. 놓는 방법도 모르거니와 놓으면 그 다음이 힘들어 질까봐 하는 두려움에 앞서다 보니 실제로 머리속에는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하고서 실제로 행동을 못하고 계속 망설이고 있는 듯 합니다. 
보리심을 낸다는 것은 우리가 매 법회시간 마지막에 부르는 사홍서원을 실천하면 발보리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신심
부처님께서는 삼보에 대한 신심을 말씀 하셨습니다. 삼보에 귀의 하면 세세생생 삼보에 기댈 수 있습니다. 불교의 신심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고 반드시 그것을 믿어야 하는 건 아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생각하여 말이되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는 신심이란 우리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명상이나 염불 등을 통해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선” 수행, “천신”, “신통력” 등에 대해 검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심의 완성은 수행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처음 신심을 낸다고 하더라고 끊임 없이 수행을 하지 않으면 신심이 완성되지 않고 퇴보되고 맙니다.

부처님께서는 게으름을 멀리 하라고 하셨습니다. 늘 깨어 있고 생각을 깊이 하여 삼독에 빠지지 말게 하기 위해 수행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화엄경에 대한 스님 법문을 통해 저에게 불법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이 늘어 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행에 대한 실행을 정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법문 시간에 여러번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고 항상 강조하시는 깨어 있는 불자가 되어 하루에 5분이라도 화엄경 독송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정작 저는 실천을 못하고 있습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겠다고 계를 받으면서 약속했고 매번 법회에서 예경을 하면서 귀의를 다짐하는데 말로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부터라도 매일 잘 이해는 되지 않으나 독송을 열심히 하도록 하여 제 스스로 작게라도 실천할 수 있는 수행을 하리라 다짐합니다.

[참고]
붓다카페, 불교성전, 현안스님, 불교신문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자성화(신은영)
보리심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은 깨달음의 마음. 깨달음을 향한, 혹은 이미 깨달은 마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상구보리 하화중생

신심
불교의 가르침과 삼보를 의심없이 믿는 마음, 발보리심, 십신의 첫번째 단계. 
‘구사론(具舍論)’에서는 신심을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 하고,  ‘화엄경’에서는 모든 공덕의 어머니로서 일체의 착한 일을 자라게 하고, 일체의 의혹을 제거하며 위없는 깨달음의 문을 여는 것이라 합니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는 불법(佛法)의 대해로 능히 들어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을 신심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신심이란, 세상 모두가 헛개비 그림자여서, 모두가 공(空) 아닌 것이 없다는 데 대한 철저한 믿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법(緣起法)과 인과(因果)에 대한 믿음, 그리고 분별심(分別心)과 집착심을 없애면 마음을 깨쳐서 영원히 괴로운 윤회(輪廻)에서 벗어난다는 믿음을 말한다.’ -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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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찾아보니 신심과 보리심에 관한 글들과 동영상이 끝도 없이 올라와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 설명은 다르고 단어가 다르더라도 결국에는 한 의미일 것입니다. 보리심을 보리심이라고 부르고, 신심을 신심이라고 할 뿐 그 의미는 통하는 것이니까요. 

화엄경 현수품 1을 읽어보고, 그 장이 보리심과 신심에 대한 설명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초발심의 공덕은 칭량할 수 없는 것이며,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고, 어느때나 즐겁게 하고, 세상에 이익주고, 바른 법 받아 지헤 닦아서 보리를 쌓으려고 발심을 하고  부처님과 부처님법을 깊게 믿고, 불자들의 행하는 도리도 믿고, 위없는 큰 보리를 믿는 마음으로써 발심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신심은.., 신심은.. 하면서 신심에 대한 정의가 나오고,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 차레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믿음으로써 십자재, 십지를 이루고, 보리를 이룬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결국엔 신심이 확고하면 성불도 확실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지암스님께서 수다원이 되면 7생안에 성불한다고 하셨는데, 바로 수다원이 물러나지 않는 신심이 생긴 경계라 말씀해 주신 것이 생각납니다. 현수품을 읽어보면서 신심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 너무도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어서 좋았습니다. 어쩌면 확고한 믿음 자체가 확철대오가 아닌가 싶습니다. 확고히 믿을 수 있다는 자체가 불법을, 인연연기와 공성을 확철히 믿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신해행증이라고 하는데 믿고 이해하고 수행해보고 증명한다는 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우에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 먼저 이해가 되어야 믿음이 간다고 해야할까.. 맹목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 부처님법을 공부해 나가면서 믿음이 생겨나는 쪽인 것 같습니다. 그 확철한 믿음이 생기는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 아닐까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또 이 우주를 보면 부처님이 그 옛날 어쩜 이렇게 잘 분석하고 설명해 놓으셨는지 감탄할 따름입니다.   

특히 신심을 내고 보리심을 내는 이유가 나만 좋고 큰 명예를 구함아니고, 중생의 고통을 아주 없애고, 세상에 이익주려함이라는 말, 상구보리 하화중생, 지혜와 자비, 보살도와 보리도, 불교의 핵심인 말입니다. 

처음엔 내 괴로움과 내 문제를 풀기위한 지혜를 얻기위해 부처님법을 공부했는데, 화엄경을 만나면서 나의 지혜를 구함이 결국에는 나와 남 모두를 위하는 길이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인연법, 연기법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고, 보리도와 더불어 보살도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다들 물러나지 않는 신심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참고: 
화엄경 현수품 1
위키백과 - 보리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심
한국고전용어사전 - 보리심
시공 불교사전 - 보리심
두산백과 - 신심
불교신문 - 진우스님 <15>“공(空)과 인과(因果)에 대한 신심(信心) 있어야 진정한 불자”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화인(홍현정)
화인 숙제 올립니다.

•보리심
깨달음의 마음, 그 깨달음으로 중생을 교화 하려는 마음 이것이 사전적 의미의 보리심 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보리심은 상구보리.하화중생 이라고 생각 합니다. 위로는 부처님 법을 구하는 마음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 하려는 마음, 이 두마음이 적절히 어우러진 상태, 그 마음을 일으키는 자가 보살이고 보살이 일으키는 그 마음이 보리심이라 생각 합니다. 내가 실천하고 있는 보리심은 부처님법을 공부하고, 스님들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인들을 부처님과 인연되어 지게 히려고 말 한마디, 좋은 글귀하나 카톡으로 보내는 정도 입니다. 아직은 너무 작은 실천이지만 꾸준히 공부해서 탐.진.치 삼독이 많이 해결되면 더 큰 마음을 낼수 있을 것이고, 내 자체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을꺼라 생각 합니다.

•신심
어떤것을 옳다고 굳게 믿는마음, 종교를 믿는 마음. 이것이 사전적 의미의 신심 입니다. 내가 생각 하는 신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없이 배우고, 익히며 삼보를 수호 하겠다는 마음이 신심인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절에 열심히 다닌적도 있었고 다른종교를 기웃거린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불교로 돌아온것이 신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앞으로도 이마음 떠나지 않고 부처님 법을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백련화(권혜정)
백련화 숙제 올립니다. 

저는 보리심(菩提心)을 발하는 것이 불교 수행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실제로 보리심을 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경전을 읽거나 강의를 들을 때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표면적인 이해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보리심은 그런 이해를 넘어서 깨달음을 향한 강렬한 의지와 실천으로 나아가는 마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삶을 불교적 실천으로 돌리겠다는 그 의지가 바로 보리심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절에 다니는 여성 신도들을 보살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물론 보살이라는 명칭은 보리심을 발한 자에게 주어지는 이름이지만, 절에서는 남녀 모두에게 이 명칭을 사용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보살님들처럼 자비심과 깨달음을 지닌 존재가 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모든 이가 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된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살이라 불리는 것은, 우리 역시 깨달음과 자비심을 향해 나아가라는 격려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한편, 남자 신도들은 한국의 절에서는 '처사'라고 부르고, 우리절 보현사에서는 '거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숙제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과연 나는 보리심을 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던 중 지암스님께서 어느 일요일 법문 중에 하신 말씀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스님께서 “부처님 말씀을 믿습니까? 그럴리가요!”라고 하신 말씀은, 제가 보리심을 낸 적이 있는지 고민할 때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이를 통해 제 안의 신심이 과연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보리심이 깨달은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신심을 내는 순간에도 깨달음이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제가 그런 깨달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돌아보면,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보리심이 한순간에 크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작게나마 실천하는 순간들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탐구하고, 경전 속의 지혜를 실천하려고 하는 작은 의지들이 보리심의 씨앗일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작게나마 얻은 깨달음들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보리심을 기르는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신심을 내고 불법을 실천하려는 그 작은 순간들 속에서도 보리심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내가 보리심을 낸 적이 있는가?”라고 묻기보다는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보리심을 키워가고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이 마음을 더 자주, 더 깊이 발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여산(이여산)

여산 숙제 올립니다.

보리심이란,
광활한 우주가 꽉 채워져서 
바늘 하나 들어갈 공간이 없는 공을 움직이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 가고픈 나의마음.

심신이란,
무엇 하나 트집 잡을것 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심할 
나위 없어서 흐름에 맡겨두고 
성성적적, 또렸하게 깨어있기를 기원하는
나의 마음.
 
숙제하기 위해서  
보리심과 신심…
 
뜻을 깊이 사유해 보니
보리심과 신심은 
마치 다른 두 영상이
겹쳐지면서 하나가 되는 
착시가 일듯이
생각하면 할 수록 하나 입니다

온라인에 들어가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확실한 정보를 얻어서 
멋있고 그럴싸한 
숙제를 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꿰어 맞추어 보아도
그런 정보들은 내것이 아니기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느낌이였습니다
그래서 부족하고 어색하나마 
순수 내것을 숙제로 올려봅니다
하지만 여러 법우님들께 혹 누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도 앞서네요
그저 부끄러울뿐 이지만 
이것이 저의 옹색한 살림살이 입니다

확철대오견성성불.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정명(박순홍)
정 명 (正明) 글 올립니다
                           
1.신심이란                                                                              불자로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도해 주시는 스님을 철저히 믿고 가르침을 받아 생노병사의 고통을 끊어버리고 늘 어디에서나 있음 에도 찾지 못하는 청정 자성을 홀연히 깨달아 확철대오하여 견성성불해서 우주 에 있는 일체 유주, 무주의 중생을 제도하 겠다는 우리의 금강석의 마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타 종교의 맹신적으로 조건 없이 믿고 의탁하고 따름과는 전혀 다른, 우리는 불성 을 갖고, 부처의 성품을 갖고 있기에  언젠 가는 부처님과 같이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용수보살의 『지도론』에는 신해행증을 말씀하셨음을 1학기 때 배웠습니다.
앞에 자성화 도반님의 글에서 “선이해 후믿음으로 함이 어떤가”하고 반대로 행하면 어떨지 말씀해 주셨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먼저 내가 자성을 가지고 있음에 언젠가는 깨달음의 맛을 보고 성불하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믿음이 없이 부처님의 경을 간경 하고, 찬탄하고, 예를 올린다면 이는 이해에 따른 지식만 쌓인 체 경을 보고, 참선을 하며, 보살행을 실천할 수도 있겠지만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오래갈 수 없다고 봅니다만……                                                       (미안합니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법우님의 글에 토를 달다니…)    
                         
저는 그동안 무늬만 불자로 살아왔었음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믿음만 있고 아는 바가 없으면 무명만 더하여 교만이 치성하고, 알기만 하고 믿음이 없으면 사견만 더하니 믿음과 아는 것이 겸하여 야만 비로소 모든 올바른 행위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이왕 수행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제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믿거든 바로 알아야 하고, 알면 반드시 실천해야만 깨달음의 세계가 거기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신심은 보시 잘해 인색치 않고
  신심은 환희하게 불법에 들고                             
  신심은 지혜공덕 증장케 하며
  신심은 여래지위 이르게 하네”

2. 보리심이란                                                                        한마디로 보리심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구하고, 그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이 보리심입니다. 부처님은 보리심을 발하는 것으로 중생들의 의지처가 되고 다함 없는 부처님의 활동의 바다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리심은 노력과 정진의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부처님의 깊은 방편의 바다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는 힘이 있어서 부처님의 바다는 정화되는 것입니다.

<현수보살품>에서는 보살은 어떠한 동기로 보리심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설하고 있습니다.
현수보살은 3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깊고 청정한 믿음입니다. 앞의 신심에서 말씀드렸기에 짧게 올립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은 부처님의 삶에 감동받아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자신도 부처님이 걸으신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불법에 대한 믿음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익혀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갈고 닦겠다는 마음입니다.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을 시대와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스승과 도반들을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며 이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信)과  보리심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불법승 삼보에 대해 깊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믿음이 곧 보리심 입니다. 보리심은 믿음이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는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보살은 자신을 윤회의 고통 속에 빠뜨리는 욕망과 집착의 속성을 잘 알아서, 욕망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열의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뿐 아니라 욕망과 집착으로 인해 고통 받는 다른 중생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자비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을 추구하는 강한 열의와 함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중생들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자비심이 동기가 되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해탈을 향한 추구와 자비심이 보리심을  낳는 또 하나의 인이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번째는, 부처님의 바른 진리를 배워서 자신도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고자 원하는  강한 구도의 열정과 정진의 마음이 보리심을 낳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강한 구도의 열정을 갖고 53선지식을 찾아가는 것처럼, 설산 동자가 진리의 한 게송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구도열에서 볼 수 있듯이 진리와 향상을 추구하는 배움과 공부에 대한 열정이 또한 보리심을 낳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고 : 네이버의 극락회상에서)

오늘도 내 이웃에 대한 배려와 인색한 마음을 내지는 않았는지를 돌이켜 보며,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인 중도의 바른 깨달 음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되돌아 보고,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백분의 일이라도 닮아 쉼 없이 나아가 한 생각 알아차려 방일하지 말고 해태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확철대오 하리라 믿는 마음으로 정진해 봅니다.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보장화(김경희)
보장화숙제 올립니다. 
   신심과 보리심은 불자가 갖춰야할 처음이자 완성이라 생각합니다.
 
♡•신심이란 불법과 삼보를 굳건히 믿는 마음으로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1. 한결같은 진여심을 믿는것.
2.부처를 믿는다는 것은 진여한 마음을 회복해 부처가 무한한 공덕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착한맘을 일으켜 부처님처럼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는것.
3.법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는것.
4. 승가를 믿는다는 것은 나와 남을 이익되게 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하며, 본래 자성불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승단을 믿는다는 것.
그러나 신심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신심이 성취될수 없음을 강조하시며,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등의 5행을 닦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조선 중기 지눌스님은 조사문祖师门 과 교문教门으로 놔눠 설명하십니다.
1.교문...사람과 천인으로 인간을 믿게하되 복락을 좋아하는 이는 십선을 닦으면 인간과 천상계에 태어나는 과를 믿고, 공적을 좋아하는 이는 사성제의 법문을 믿으며, 불과佛果를 좋아하는 이는 육바라밀을 닦아야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중생의 근기에 따른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2.조사문...자기가 본래 부처요 열반의 묘체가 개개의 법에 원만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고 열반과 부처를 다른 곳에서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원래부터 갖추워져 있음을 믿는것.
  또한 인과와 자성불에 대한 믿음외에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가피력에 의지하는 미타신앙, 미륵, 관음, 지장신앙 등이 있습니다.

 ♧•보리심...보리菩提는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자 음역으로 보제라 쓰고 보리라 읽습니다. 보리로 인해 윤회 사슬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하며,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석가모니는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보리심은  깨달음의 마음, 깨달음을 향한 마음,이미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성불하기를 열망하는 대승 불교도의 첫 동인動因 인 초발심, 발보리심을 가리킵니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보리심을 냄으로써 부처를 이룰 수 있는데,  사홍서원이며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를 발원하는 것 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세친보살의 왕생론에선 보리심을 낸다는것은 부처가 되기를 원하는 맘이며, 부처가 되기를 원하는 맘은  곧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맘으로 중생을 거두어 부처나라에 태어나도록 이끌겠다는 맘이라고 하셨습니다.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에선 보리심을 갖고 향하나만 피어도 일체 중생과 같이 피우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했으며, 업장소멸도 보리심이 으뜸으로 보리심보다 큰 공덕이 없다고 합니다.
참고 : 유튭 불바보tv-보리와 보리심   
유튭 광우스님의 법공양,
유튭 원이룬tv- 발보리심이란?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내 견해 :불자로서 신심을 갖고 보리심을 발해서 수행을 성숙시켜 나가 무상정득정각이란 보리의 완성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안락을 위한 기복적인 신심을 갖고, 오랜시간을 신행 생활을 했고 보리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어설프지만 발보리심한 것이 불대를 수강 이후의 일이니 오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과 법을 공부한다는 것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습니다. 막연한 믿음이 구체적이고, 굳건해 지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적인 측면이 강한 보리심은 극락왕생 하려는 데도 주원인이 되며, 칭명염불은 부가 된다고 원효대사께서 말씀하셨답니다. 화엄경에선 보리심 없는 선법은 마구니의 업이라 합니다. 그만큼 보리심은 불자들의 신행생활에 꼭 필요 하다고 생각 합니다. 신심이 나의 물질적, 육체적 나아가 생명의 불이익이 있더라도 부처님의 법을 믿고 법데로 행동하는게 이롭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과 나의 불성을 굳건히 믿는것이 신심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도된 맘은 완전한 신심과 보리심을  가로 막곤합니다.  시작은 나의 복과 안락을 바라는 신심 이였다면, 갈수록 보리심에 비중 둔 신심으로 가야함을 일깨워 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덕현(최성일)
덕현 숙제 올립니다.

신심

불교에서는 이 신심에 의지하여 지혜를 얻고 불도(佛道)를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신은 신앙이라기보다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똑바로 알아서 그대로 실천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반드시 훌륭한 일이 생긴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구사론(具舍論)』에서는 신심을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공덕의 어머니로서 일체의 착한 일을 자라게 하고, 일체의 의혹을 제거하며 위 없는 깨달음의 문을 여는 것이 신이라고 정의하였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는 불법(佛法)의 대해로 능히 들어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을 신심이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고승들도 신심에 대해서는 독창적인 설을 나타내어 보였다. 신라의 원효(元曉)는 신을 ‘크게 그렇다(大然)’고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는 신심을 직심(直心)과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을 함께 갖춘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때의 직심은 세상을 동체(同體)의식을 가지고 평등하게 보는 마음이고, 심심은 지극히 선한 마음이며, 대비심은 자비스러운 마음이다.그리고 원효는 이러한 마음을 갖춘 사람이 믿어야 할 대상을 근본과 불(佛)과 법(法)과 승(僧)의 넷으로 크게 분류하였다.

첫째, 근본을 믿는다는 것은 참되고 한결같은 진여심(眞如心)을 믿는다는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이 돌아가야 할 바요, 모든 행위의 근원이 되는 근본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부처를 믿는다는 것은 진여한 마음을 회복해 가진 부처가 무한한 공덕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켜서 부처처럼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을 뜻한다.

셋째, 법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교훈을 실천하면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넷째, 승가(僧伽)를 믿는다는 것은 나와 남을 이익되게 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하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무리들을 믿는다는 것이라고 원효는 해설하였다.

그러나 원효는 신심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신심이 성취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지관(止觀) 등의 5행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참고문헌『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원효)『화엄경(華嚴經)』

 
저에게 신심이란 수행의 시작이자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 막연히, 그리고 대대로 어른들이 믿어서 불교라고 말을 했지만 타 종교인과 논쟁이 있을 때 불교의 교리나 내가 이해하는 논리로 반박조차 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회의가 있을 때 가끔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걸 알려 주려고 합니다.
이런 지금의 나와 예전의 나의 차이는 그냥 알음알이나 교리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가 아니라 신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보현사에 오시고 제 스스로가 아닌 스님의 자비와 방편으로 이 문에 들어온 것이 저의 시작이나 이런 저를 포기하지 않고 행동과 실천이 함께 하는 공부로 이끌어 주셔서 이만큼이라도 오게 되었습니다.
신심의 크기가 ‘내가 얼마나 주인공의 삶을 사느냐’ 로 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끌려서 마지못해 하는 사람과 내가 너무 즐겁고 기쁘게 하는 사람의 속도가 갔을 수가 없듯이 내가 주인공이 되어 이 공부를 하려면 나의 믿음과 신심은 필수일 것입니다.

 

 보리심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은 불교에서 깨달음의 마음. 깨달음을 향한, 혹은 이미 깨달은 마음을 말한다. 여러 가지 명칭이 있으나 그것은 오직 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보리심이 일어났을 때 땅이 진동하며 부처님의 법좌까지도 진동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의 공통된 업으로 우주가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보리심은 모든 중생들을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하기 위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염원(상대적 보리심), 모든 것이 공 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완전히 깨어난 마음(궁극적 보리심)을 말한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분들도 부처님의 아들, 딸이 되어 인간과 신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된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화엄경>은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가 보리심을 내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노래한다. “보리심은 곧 큰 길이니 능히 모든 지혜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까닭이니라. 보리심은 곧 맑은 눈이니, 삿되고 바른 이치를 모두 보는 까닭이니라. 보리심은 곧 밝은 달이니, 모든 거룩하고 청정한 법을 원만케 하는 까닭이니라….”

보리심은 안과 밖이 없기에 중도의 ‘큰 길’이다. 일체 중생이 함께 발심하는 순간 이미 구경각의 문 안에 들어간다. 그런 보리심은 중도의 정안(正眼)이기에 ‘맑은 눈’이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님을 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본다. 또 보리심은 실상 반야를 사무쳤기에 ‘밝은 달’이고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법을 두루 비추어 원만케 한다. 또한 보리심은 명경지수(明鏡之水)의 샘물이기에 ‘맑은 물’이라서 번뇌가 본래 없음(本來無一物)을 통달해 위 없는 깨달음을 증득한다. 마지막으로 보리심은 중생의 복전이기에 ‘좋은 밭’이다. 가지가지 보리수가 자라나 보리의 열매가 가득한 중생의 어머니이기에 ‘부처의 씨앗’이다. 이로부터 제불이 출세해 정토를 장엄한다.

그런 보리심이란 중도정관(中道正觀)으로서 제법의 실상을 깨달아 일체 중생에 대한 대비심을 일으켜 사홍서원을 세우고, 사홍서원으로 선정을 닦아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리심을 낸 발심수행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이다. 이렇게 선을 수행하여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서 일체 중생을 법으로 섬길 때 보리심은 완성되는 것이다.

                        출처: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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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여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신심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합니다.
이 신심의 바탕에서 바르게 보고, 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 정진하고 깨어 있고 집중하여 부처님의 정법으로 깨닫겠다는 마음으로 항상 깨어 있어 알아차리고 행동하는 불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 깨닫게 하기 위해 세상에 나셨다고 합니다.
불에 달군 쇠 꼬챙이가 무서운 줄 모르고 만지면 더 크게 다치듯 무지하여 지은 죄로 2차, 3차 화살을 맞아 더 큰 죄를 짓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정신이 조금이라도 맑을 때 열심히 공부하고 그러기 위해 나의 신심이 증장하기를 빕니다.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자연성(강은아)
삼악도를 벗어나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부처님 세상에 태어나기 어렵다. 
부처님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가르침[도(道)]을 만나기 어렵고, 
가르침을 만났더라도 신심을 내기 어렵다. 
신심을 일으켰더라도 깨닫고자 하는 마음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기가 어렵고,
보리심을 발하였을지라도 
'무상대도의 성품'을 보기가 어렵다. - 사십이장경 

*보리심
깨달음의 마음, 부처님과 같이 내 안의 불성을 찾고자, 깨닫고자 하는 마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위로는 진리(깨달음,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자비)을 제도한다. 

*신심
믿는 마음, 믿음
믿음은 무속신앙을 포함해 모든 종교의 시작인 것 같습니다. 믿음을 어느 방향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수 많은 길로 나아갑니다. 
부처님법을 만나고, 불교 안에서도 수 많은 길이 있고, 부처님 정법을 만나 바른 길로 믿고 나아가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백천만겁 지내어도 만나기 어려운 일,
이 생에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며 잘 가르쳐 주시는 선지식 스님을 만나 바른 신심을 키워나가며 수행을 하고 있으니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높고 깊은 미묘한 부처님법 
백천만겁 지내어도 만나뵙기 어려워라~' 

***20대에 절에 가며 부처님을 만났을 때는 주로 나의 소원을 얻기 위해 기복으로 맘을 내었었고, 
예불, 불공, 기도...를 하고 스님들 법문을 들으며 신심이 나기 시작했으며,
부처님법을 알아가면서는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얻고 싶어 깨닫고자 하는 마음, 보리심을 내었습니다. 

*선원장스님을 만났을 때는 지극히 소승적이고 작은 우물안에 갇힌 개구리로 살며, 나만의 평안, 안락을 위해 깨닫고자 하는 이기적인 보리심을 내었다면 느리더라도 꾸준히 수행을 해나가는 지금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리심을 조금씩 내어가고 있습니다. 
티끌 만한 부처님 법의 맛을 본 것으로도 
내가 좋으니 가까이는 가족부터 친한 이들이 불법의 맛을 보아 다같이 좋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스님께서 신심이 그 모양이냐 쯧쯧...하시면 인정할 때도 있고 그래도 나름 신심이 있는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나의 신심, 보리심을 들여다보니 스님 말씀이 맞네!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 신심의 차이.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은 들면서, 
부처님을 모시고 법회를 보며 마음 닦는 절도량 일을 마음을 담지 않고 손님처럼 하는 모습을 보면 스님께서 그러심은 당연하십니다. 

'발을 들고 내림에 도량 아닌데가 없다.(늘 알아차리기!)'고 스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머리로는 백 번 들어도 내 것이 안되면 남의 일인 것처럼 이제 마음에 조금 더 와닿습니다. 

*현수품, 보살의 신심은 모든 공덕의 기본이며 신심, 믿음만 올곧아도 여래 지위에 오를수 있다 합니다.
믿쉽니까? 머리로는 믿습니다! 
믿기만 하면 바로 내가 부처이고, 내가 관세음보살이며, 여기가 극락이라 하는데 믿음이 올곧지 않아 그대로가 안됩니다.

내 마음을 잘 들고 다님에 신심, 보리심이 다 들어있고, 주인공으로 사는 것인데
나의 현재 신심은 불법승을 향한 믿음은 있으나 (굳건하러 가는 중) 믿는 힘이 견고하지 않아 마의 경계에서는 늘 흔들립니다.
아침에 좋은 마음으로 발보리심하며 환희에 차서 행을 하다가 저녁에는 그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자비도량참법 '보리심은 한 번만 발할 것이 아니고 자주자주 발하여 보리심이 끊이지 않게 해야 하느니라' 처럼 힘이 생길 때까지는 참선, 관세음보살 염불, 알아차리기... 수행을 계속 해야겠습니다.

확철대오 견성성불()
원아불퇴보리심()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이지연
보리심
처음에는 보리심의 정의가 크게 두가지, 1. 부처가 깨달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2. 불도의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 중생을 교화하려는 마음 이라고 생각했는데 1.의 부처의 깨달음의 바탕이 지혜 자비 인것을 보면 결국 보리심은 지혜와 자비로 깨닫고 중생을 구제하는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경을 읽을때 맨 마지막에 불경 드린 공덕이 전 중생에게 닿기를 기원하는 부분을 참 좋아하는데 그럴때마다 나만 들여다 보기 바빴던 마음을 되돌아 보고 이 작은 기도 공덕조차 나누고자하는 자비의 마음을 느끼면서 뿌듯함을 느끼곤 합니다. 예전에는 지혜와 자비를 나누어 보았는데 결국 지혜가 자비를 자비가 지혜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요즘 수업을 들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심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신심은 여러 곳을 찾아봐도 대체적으로 불교의 가르침과 삼보를 의심 없이 믿는 마음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에 따르면 '신심은 직심(直心)과 심심(深心)과 대비심(大悲心)을 함께 갖춘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세상을 평등하게 보는 마음(직심), 지극힌 선한 마음(심심), 자비스러운 마음(대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또한 결국에는 보리심, 지혜 자비와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혜로움으로 세상을 평등하게 볼 수 있고 자비로움이 곧 심심과 대비심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저에게 신심은 항상 난제입니다. 불교의 가르침과 삼보를 의심 없이 믿는 마음이 신심이라면 나는 신심이 깊은가 얕은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신심은 불법을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따라 깊이를 논할 수 있을 텐데 진심으로 받아 들인다면 뭐든 자연스럽게 실천으로 이어질 테니까요. 불법승을 받듣고 불법을 익혀 지혜와 자비를 쌓고자 하는 원을 세웠으니 신심을 쌓는 첫 걸음은 시작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격하게 납득이 되는 사소한 것들 조차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 갈길이 멀구나,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참조: 원불교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 등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정진(김효성)
정진 숙제 올립니다. 

보리심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은 불교에서 깨달음의 마음. 깨달음을 향한, 혹은 이미 깨달은 마음을 말한다. 여러 가지 명칭이 있으나 그것은 오직 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보리심이 일어났을 때 땅이 진동하며 부처님의 법좌까지도 진동한다고 한다. 
출처 - 위키백과


신심
    신심은 불교의 가르침과 삼보를 의심 없이 믿는 마음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이 신심에 의지하여 지혜를 얻고 불도를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신은 신앙이라기보다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똑바로 알아서 그대로 실천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반드시 훌륭한 일이 생긴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공덕의 어머니로서 일체의 착한 일을 자라게 하고, 일체의 의혹을 제거하며, 위없는 깨달음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하였다.
출처 -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저의 생각
화엄경은, 신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 라고 하였듯이 불도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신심이 생겼던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고, 제 주위의 많은 이들의 보살핌과, 무지로 알아차리지 못한 수많은 인연과 부처님의 가피가 계셔서 이자리에 있는것 같습니다.  신심을 주신 부처님께 감사하며 보리심을 키워가는 노력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시아원(한희주)
시아원 숙제 올립니다 ()

●보리심에서 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줄임말, 곧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한자로 이야기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번역을 하지요. 가장 높고 가장 바르고 가장 완전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출처 네이버 무각스님

●신심은 불교의 가르침과 삼보를 의심 없이 믿는 마음을 가리킨다. 불교에서는 이 신심에 의지하여 지혜를 얻고 불도를 닦아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리심에 대한 저의 견해입니다. 

보리심은 불교 궁극의 목적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성취하여
대승보살도를 깨달아 만 중생을 자비심으로 이끌어 모두 부처를 이루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지 않고 맑고 고요한  자성에 이르러 비로소 자유로운 참나에 다가가기 위한 
발심으로 삼보께 귀의하여
발보리심을 냄으로써 진정한 불자의 길에 들어가 스스로를 밝히는 참지혜를 얻는것도 보리심이라 생각됩니다 .

■신심에 대한 저의 견해입니다 

신심이란 조금의 의심 없이 부처님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는 강력한 내 마음의 힘이라 생각됩니다 .
이세상 무엇이 와도 맘 속에 자리잡은
[오직 부처님]을 외치며 물러서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써
삼보께 귀의하는 자세입니다


확철대오 견성성불 광도중생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보각(김다한)
저는 배우기를 보리심은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위해 내가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겠다는 원을 세운 마음이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보통 보리심 하면 이 앞 부분만 생각하고 (중생에게 이익), 이 뒷부분 (그러기 위해 내가 성불함)은 자꾸 까먹습니다. 어쩌면 저에게는 지혜를 깨닫겠다는 동기는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해서인거 같습니다. 예전에는 명상할때도 내가 번뇌로부터 벗어나야지 하면서 항상 앉았는데, 여철스님께서 중생을 구제하려는 원을 세우면서 명상을 시작하신다는 말을 듣고 많이 배웠습니다.
저는 예전에 신심은 나도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공부해보니 신심은 불, 법, 승 삼보를 의심없이 믿는 마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나에게 불성이 있으며, 부처님의 공덕, 그리고 나도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러면서 이런 진리를 추구하는 도반들과 스님과 가까이 하는것이라고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신심은 수행의 동력이자 전부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을 알게 되서 참 기쁩니다.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작성일
#*녹야원(이경희)
보리심: 깨달으려는 마음
신심: 보리심의 토대

저는 급하게 숙제를 하는터라… 
일요법회에 스님께서 언급해주신.. 제 이야기만 나누겠습니다.
저는 20대중반쯤 불자로서는 아니고 어쩌다 부담없이 그냥 읽게된 경전 해설서(무비스님) 몇권을 계기로 경전에 대한 관심이 생겼었으며.. 그 후 참선을 하면서..(이때도 비 불자의 마음) 자신감 충만한 20대를 살았고… 종교는 미신이란 생각으로 살다…
불자라는 마음과 나를 성찰해 깨달아 보겠다는 생각을 조금(?) 갖고 불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쯤 전… 참선도 좀 해 봤겠다.. 기도도 좀 해 봤겠다… 그냥 저냥 불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현사에서 스님과 함께 처음으로 100일 기도도 열심히 해 보고.. 육바라밀은 뭔지.. 눈과 글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행을 미흡하게나마 하면서 기도도 하니..
신심도 더 강해지고 그럴 수록 더 깨달아야겠다는 갈망도 생기는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정말 열심히(?)는 못 하는거 같아 늘 나한테 미안하지만요 ..
이렇게 전 신심이 토대가 되어 보리심이 커지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흰구름님의 댓글

흰구름 댓글의 댓글 작성일
#*녹야원
그래서.. 근자감과 자만심이 가득했던 제가.. 얼마나 교만한 나를 조금 마주함으로써 그 조금을 마주하기도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일요법회때 법문을 들을때 최소한  늘 하나씩은 귀에 꽂히는게 생기게 되면서 소중함을 더욱 알겠됐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법문은 놓치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_()_

일요 법회 : 매주 일요일 오전 10:30 AM
선방 모임 : 매주 수요일 저녁 7:00 PM
불교 대학 : 매주 화요일 저녁 7:00 PM부터
1130 Abrams Rd, Richardson, TX 75081     Tel : 972.238.8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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